경허의 北行은 도피성은둔일까 자리비워주기일까?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은데 세상은 위태로우니/
어디에 몸을 감춰야 할지 알 수 없네 /
어느 한적한 어촌 주막엔들 숨을 곳이 없을까마는 /
다만 이름을 감출수록 더욱 새로워질까 두려울 따름이다."
만공(滿空) 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의 입을 맞추는 등의 파격적인 일화로 널리 알려진 경허(鏡虛) 스님(1849-1912).
근대 한국 선(禪)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그는 만년인 1906년 갑자기 삼수갑산으로 종적을 감췄고 이름을 박난주로 바꿔 훈장 노릇을 하다가 은둔한 지 6년 뒤인 1912년 입적했다. 그는 왜 북행(北行)을 택했을까.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최근 불교평론 가을호에 실린 기고문에서 "경허는 음주식육과 여색(女色) 등 비도덕적, 계율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로 인해 승가의 구성원들과 세인들로부터 '악마' '마종(魔種)'이라는 원색적인 비판과 비난을 사게 됐고, 그 결과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도피성 은둔'이라는 것이다.
불교평론에 대한 폐간 결정이 내려지는 등 논란을 불러온 윤 대표의 주장에 대해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가 '염치'라는 단어로 반박하고 나섰다.
박 교수는 오는 21일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학술세미나'에 앞서 배포한 발제문에서 "경허의 북행은 일종의 '자리 비워주기'로 이해된다"며 "경허는 염치가 상실된 시대를 강렬한 역사의식과 수행의식을 통해 돌파해내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단 한 분야에서 이름이 높아지면, 자신의 식견이 닿지 않는 분야에서조차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세상의 속성"이라며 "그래서 늘 일을 그르치곤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허는 이런 문제점을 간파했고,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식견과 안목을 지닌 수행자가 불교계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자리를 비워준 것"이라며 "그래서 은둔의 방식 또한 완전한 소멸의 형식을 취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경허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라며 "그와 관련된 파격과 기행의 얘기들이 적잖게 전해지고 있지만, 정작 현재 남아 있는 경허의 유문(遺文)을 통해 보면 그는 그 어떤 수행자보다 엄격하고 방정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런 경허의 행적과 사상은 불교 고유의 목적과 지향점에 부합하는 승가 윤리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좌표와 기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이외에도 '경허의 문학' '경허의 법맥과 그 계승' '경허의 간화선과 수행관' '한국불교의 증흥조, 경허'를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효탄 스님, 김방룡 충남대 교수, 신규탁 연세대 교수가 발제자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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