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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 김자원 사장ㆍ진행자

법왕청 2014. 3. 22. 19:50

                                    차 한잔의 초대/ 불교방송 김자원 사장ㆍ진행자

 

“방송위해 읽는 법구경 구절구절, 실은 나를 위한 것”

 

파란만장한 인생 살며 겪은 억울함.분노 불법으로 다스려

 

 

김자원은 불교방송 사장ㆍ제작자ㆍ진행자, 장거리전화회사 사장, 수필가, 배우, 요가 선생, 그리고 3남1녀의 어머니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것이 무언지 궁금해진다.

 


법구경으로 마음의 평안 얻어
“1995년 4월에 시작된 뉴욕불교방송이 내년이면 20년이다. 좋아서 했기에 가능했다. 부처님 말씀을 올곧게 전하기 위해 오체투지와 간절한 기도를 했다. 마음에 일던 두려움이 가시고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현재 뉴욕 유일의 불교방송은 토요일 오후 4시, 재방송은 일요일 오전 4시 AM1660을 통해 뉴욕의 불자들을 찾아간다. 1997년 4월 한국 IMF 여파로 몇 개월 쉬었을 뿐 그해 8월 다시 개통하여 매주 토요일이면 사찰 소식, 법문, 불자 인터뷰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에는 캐롤도 틀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신부와 수녀의 축사 방송도 들려준다. 열린 마음으로 부처의 가르침이 진행된다.

김자원은 뉴욕 뉴저지에 산재한 20개이상의 사찰을 수시로 찾아다니며 취재 하고 한국에서 온 스님 법문도 녹음하러 다닌다. 보통 일주일에 이틀은 방송 일을 하는데 때로 시간이 촉박해 밤을 꼬박 새워 방송 준비를 한 다음 2시간 30분동안 요가를 가르치기도 한다.

뉴욕불교방송은 사찰들의 정기적 후원 외에 개인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7~8년전 여자 한분이 10달러를 내며 후원을 자청했다. 다음엔 그분의 친구 20명이 평생 후원자가 되었다. 이런 분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다.” 방송을 준비하며 읽는 법구경 한구절 구절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싶다. ‘생각이 온전하면 지혜 생기고 생각이 흩어지면 지혜 잃나니 이 두가지 길을 밝게 알아서 지혜를 따르면 도를 이룬다.’

김자원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며 받은 억울함과 분노를 불법으로 다스렸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5~6년전 법정스님의 뉴욕방문 때 법명 ‘환희행’도 받았다.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삶
김자원은 김만옥, 황분례 씨의 2남6녀 중 넷째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69년 광주간호학교를 졸업하고 70년부터 5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만몰샤인이라는 마을 어린이요양원 간호사로 일했다. 같은 한국인 간호사들과 휴가에는 유럽 여행을 하며 환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밝고 기쁜 나날을 보냈다. 20대 초반의 그는 웃음이 많았다.한국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병원에서 일하며 느낀 일상을 글로써 한국의 잡지 ‘샘터’에 기고하면서 펜팔 친구들도 생겼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별세 몇 달 후에야 듣게 되었다. 고국의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잘 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어머니 부재 후 미성년인 동생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던 차, 펜팔 친구이던 미국의 남자로부터 오라는 연락이 왔다. 외로움과 향수, 그리움이 편지 횟수가 변해지면서 사랑으로 변한 후였다. 김자원은 75년 6월 뉴욕에 왔고 그 이후 눈앞에 펼쳐진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야 했다. 그는 알고 보니 유부남, 그것을 알았을 때는 임신 중이었고 남자와 헤어지고 혼자 딸을 낳았다. 아기를 위한 일은 그 아기를 그 남자 가족의 구성원으로 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너무 보고 싶고 괴로워서 딸을 찾으러 가니 이미 롱아일랜드 백인 여성의 품에 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참담한 처지에 비해 깨끗하고 안전하게 입양되어 자라는 딸을 보고 돌아섰다.

그 후 김자원은 이민자가 거쳐 가는 모든 험한 코스를 다 거쳤다. 할렘 132가 야채가게 5년, 24가 시스터스 중국간이음식점 2년 , 큐가든 옷가게 20여년, 권총강도를 당하면서 억척같이 일했다. 맨하탄 새벽시장에 가서 옷 고르고 그에 어울리는 액세서리와 가방을 사고, 커진 보따리를 바퀴 달린 것에 묶어서 끌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다가 무게에 눌려 보따리가 넘어지기 다반사, 새벽 6시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전철 안에 앉은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주문을 거절한 적이 없다.

“손님이 원하는 사이즈나 물건은 무조건 내일 가져다줄게 하여 단골을 만들고 나중에 인생 상담을 하는 친구가 되었다. ” 그동안 서울 큰언니의 주선으로 80년 결혼을 했고 아들 셋을 낳았다. 가정, 지아비, 아이 그 모든 것의 소중함이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했고 정성을 기울여 가정을 가꾸었다. 그러나 갑자기 날아든 ‘이혼’이란 청천벽력, 남편이 이해해도 시댁식구들은 그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빌고 울고 그래도 용서하지 않았다. 세 아이를 떼놓고 나와 미친년처럼 천지사방을 걸어다니며 울었다. 갈 데가 없었다. 서브웨이에서 울다가 보니 내 앞의 유리창에 울고 있는 여자가 있더라. 바로 나였다. 주위 친구, 이웃들이 나를 위로했다. 모두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났다. 그때의 진한 그리움, 깊은 슬픔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민생활 17년간 열심히 살아오며 닦은 모든 게 허사가 되었고 당시 아들은 10살, 9살, 7살이었다. 아이들은 나중에 스스로 엄마를 찾아왔다. 17세가 된 딸이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고 세 아들도 같이 살았다. 딸 나탈리는 함께 살다가 의사와 결혼했고 현재 둘째, 셋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김자원의 자전에세이 ‘세상을 자유롭게 사는 여자’는 딸의 권유로 출간되었다.
그외 저서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 ’ 뉴욕불교방송 10년사를 담은 ‘물같이 바람같이’, 시집 ‘그때 그 시간에‘가 있다. 글솜씨가 뛰어난 김자원은 한국일보 제1회 이민 수기 당선, 시대문학 신인상 등단 후 수필가로 활동하며 길벗 동인, 미동부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요가의 마인드는 행복
100파운드, 5피트 2인치의 자그마하나 단단한 몸집을 지난 김자원이 요가를 하게 된 것은 12년 전 딸의 권유에서였다. 원래 요가를 좀 했는데 본격적으로 티칭 프로그램에 등록하며 해부학 등의 이론도 배우고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며’ 스스로 발전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는데 너무 행복하다. 요가의 마인드는 행복이다. 요가는 몸을 일깨운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을 본다. 의식이 밝게 깨어있으면 행복한 마인드가 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뷰티풀합니다, 나는 섹시합니다는 강습생들과 외치고 한바탕 웃는다.

“스스로 행복하면 남의 불행을 감싸 안을 힘이 생긴다. 그동안 내게 생긴 힘든 체험이 자양분이 되었다. 일체유심조(一切 唯心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마음의 비움을, 분노와 억울함에 잠 못자던 새벽에 돌연 깨우쳤다.”

모든 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니 나를 향한 마음도 좋아졌고 다름을 인정하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보니 한순간 모든 생활에 적용이 되더라는 것이다. 김자원은 연극배우인 딸과 함께 연기도 한다.

“난 잘 살려고 왔는데 이게 무엇인가. 나는 내 책임을 다하고 싶은데, 계획대로 인생이 안되는구나 그야말로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야. 그렇다면 내가 한번 진짜 연기를 해보자”고 절망 속에 있던 그는 93년 퀸즈칼리지에서 6개월 코스 연기공부를 제대로 했다.

독립영화 ‘The City'에서 주역인 봉제공장 사장부인, 화이자 제약회사, 뉴욕라이프 상업광고도 찍고 지금도 출연제의가 오면 기꺼이 한다. “재미로 한다. 안바쁠 때는 주연이 아닌 백그라운드로 나오는 것도 즐긴다. ” 본래 명랑하던 성격이 미국에 온 뒤 늘 울면서 지내고, 외로움으로 서럽고, 바보처럼 많이 아프던 그는 다시 명랑한 성격을 되찾았다 “인과응보다. 불교를 알게되면서 적극적으로 다시 살게되었다.

순간 순간 소중하고 진리의 소리를 접하며 세속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나 깨달았다.”는 그는 “인생은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스스로 존경해야 한다.”고 일러준다.그는 “수십년간 써온 일기장이 있다. 시간이 날 때 정리하여 단편이나 소설로 엮어보고 싶다.” 는 김자원, 이제 그녀는 울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에게 와서 한바탕 웃고 가슴이 활짝 열려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