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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 법영/자유게시판

뉴욕 방문한 '위안부 할머니"짓밟힌 인권…그 곳은 지옥이었다"

법왕청 2014. 8. 5. 18:43

                                           "짓밟힌 인권…그 곳은 지옥이었다"

 


[특별 인터뷰] 뉴욕 방문한 '위안부 할머니

 

 

15살 때 군인들에게 끌려가 하루 수십 명 상대
칼에 찔려 죽고 시신은 개 먹이 된 장면도 목격
70여 년 세월 흘렀지만 몸과 마음 상처는 여전

 

 

 

2일 뉴욕 라과디아 매리엇 호텔에서 강일출(왼쪽).이옥선 할머니가 손을 맞잡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 증언을 위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86).이옥선(87) 할머니가 뉴욕을 찾았다. 지난 2002년 미국을 처음 방문했던 이옥선 할머니는 "(너무 많아서)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하기 힘들다"고 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지난 5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을 찾은 지 두 달 만에 다시 미국에 왔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할머니들이 다시 미국에 온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수십년 전의 상처와 고통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정한 일본의 사과를 받기 위해 할머니들은 쉴 수가 없다고 했다. 2일 숙소인 퀸즈의 라과디아 매리엇 호텔에서 할머니들을 만났다.


"일본놈들을 싹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어."

할머니들의 첫 마디는 단호했다. 70여년의 세월조차 그들이 겪은 고통과 증오를 조금도 지우지 못한 듯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제일 큰 감나무집의 7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강 할머니는 경상도 사투리로 "막냉이라 사랑을 많이 받았어 그렇게 붙잡혀 가지만 않았어도…" 라고 했다.

강 할머니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열다섯 살. 그 날은 집안의 제삿날이라 부모도 장을 보러 가고 오빠들도 아직 들어오지 않아 혼자 집에 있던 날이었다.

"해질 무렵이었어. 대문 열리는 소리에 부모님이 오셨나 하고 나갔더니 칼을 찬 일본 군인 두 명이 다짜고짜 내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갔어. 끌려가다 총대에 머리를 맞은 흉터가 지금도 비가 오면 욱신욱신해." 그가 머리를 수그려 보여준 흉터에는 긴 세월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은 채였다.

강 할머니는 바로 일본으로 끌려가 그 곳에서 중국의 길림성 위안소로 이송됐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을 묻자 "심정이라고 하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지. 믿을 수가 없었어. 매일 밤 꿈에 엄마 아빠가 나왔는데 눈을 뜨면 지옥이었으니까."

강 할머니는 "많이 맞았다"고 했다. 개도 그렇게 때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인권이 상실된 곳. 그 곳이 바로 일본군 위안소였다.

눈 앞에서 한국 소녀가 '성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었고 시체는 개 먹이로 준다고 내던져졌다. 15~16세 소녀에게 매일 군인 40~50명을 상대하라 했다.

부산 보수동에 살던 이옥선 할머니 역시 15살 때 중국 연변 위안소로 끌려갔다.

"6남매 중 둘째였는데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어. 학교 한 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먹고 살기 위해 남의 집에 식모로 갔어."

이 할머니는 푹푹 찌던 7월 끌려갔다. 심부름을 다녀오다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군인 트럭에 실렸다. "소리치고 울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니까 내 또래 여자아이들 5명이 타고 있더라고."

이 할머니는 처음엔 비행장에서 잡초를 뽑고 활주로를 닦는 노동을 했다고 했다. "새벽에 눈을 떠서 한밤중이 돼서야 일이 끝났는데 그러고 찐빵 하나를 먹었어. 집에 보내달라고 울면 감시하는 군인이 주먹으로 코를 쳐서 하얀 저고리가 늘 피투성이었어. 하루는 집에 보내준다고 해서 나왔는데 그게 위안소로 가는 길이었던 거야."

할머니들은 매번 곪아터진 기억들을 끄집어내 증언을 하지만 위안소 안에서 있던 일은 차마 말로 다 못한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낯짝을 들고 그 얘기를 다 해."

이 할머니의 몸 곳곳에는 칼자국이 있었다. 오른 팔과 발등에는 세월이 지우지 못한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루는 군인 중에 높은 사람을 상대해야 했는데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쓰러지니까 발로 차고 계속 울고만 있으니까 '건방지다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뽑아 내리치는 데 내가 팔로 막았어."

위안소에서 도망치다 붙잡혀 와서 발을 잘릴 뻔한 흉터는 할머니의 작은 발등과 발가락이 이어지는 부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고통 속에도 살고자 했던 건 언젠가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해방 후 위안소를 벗어난 두 할머니는 중국에 정착했다. 길림성에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린 강 할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이 할머니는 연변에서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곧 헤어져 2000년까지 중국에서 혼자 살았다.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사망신고가 돼 있었다.

두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눔의 집에는 현재 1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산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성노예는 237명으로 이 중 사망자를 제외하고 한국에는 49명이 생존해 있고 해외에는 중국(3) 미국(1) 일본(1) 등 5명이 있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피해를 생생히 고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달 말로 1137회를 맞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를 쉬지 않고 찾는다. 미국.유럽 등 장거리 비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면서 위안부 문제는 역사 바로잡기와 여성 인권 보호라는 국제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에는 위안부 기림비가 뉴욕.뉴저지.캘리포니아.버지니아주 등에 설치돼 있다. 4일에는 7번째 기림비가 뉴저지주 유니온시티에 세워진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테러인 9.11 테러 희생자 추모비가 설치된 리버티파크에 위안부 기림비가 나란히 서게 된다.

할머니들은 "미국 정부와 한인사회의 노력에 너무나 감사하다"며 "기림비가 설 때마다 미국을 또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되풀이 되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바른 일을 하기 위해 증언하는 것이라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위안부 문제를 알리려는 다양한 노력이 많아 감사하다.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정확한 사실을 전달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사람들이 정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겪은 아픔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들은 "우리는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치욕스런 과거를 보상받는 것은 어차피 값을 매길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다 죽어도 후대가 있고 역사가 남아있는데 그 역사까지 바꿔버리려는 그것들한테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야 눈을 감지. 전쟁이 끝났다고? (일본의)사과 없이는 절대 안 끝나. 먼저간 사람들 한을 어떻게 풀거야. 그 치욕까지 씻어줄 수 있으면 수 천 수 만 번이라도 죽는 날까지 전 세계에 증언해야지."

2014년 할머니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