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그루 나무가 숲은 아니다
김희수/언어학 박사 |
불교와 유학에서 각각 비롯된 중도(中道), 중용(中庸) 사상은 넘치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균형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강도가 어느 집에서 100만원을 훔쳤는데 그 동네 조폭이 강도로부터 그 돈을 빼앗으려 하여
둘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이 때 "둘이 50만원씩 나누어 가져라"고 하는 것이 과연 중도 또는 중용일까?
우리의 직관은 아니라고 답한다. 즉 '물리적 중간 지점'이나 '아무 가치판단을 않는 기계적 중립'은
중도도 중용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외면하고 가치판단의 책임을 방기하는 비겁함이며, 결과적으로 범죄행위를 도와주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언론계에 이러한 풍조가 퍼져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3개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 안중근 의사
를 깊이 존경하게 된 그는 안중근의 사후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는 죽으면서도 그 위패를 계속 모셔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일본 혼슈의 다이린지라는 절에서 아직도 그 유언을 지켜주고 있다고 한다.
이 실화를 여느 살인범과 교도소 간수 사이의 우정으로만 그린다면, 감동과 의의는 반으로 축소된다.
안중근의 교도소 생활이 일제 치하였고 '죄목'이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이었다는 배경을
알아야만 그 감동과 의의가 온전히 살아난다. 맥락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둘째, 일제에 끌려간 조선 위안부들을 '자발적 매춘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을 미끼로 한 꼬임에 조선 처녀들이 넘어간 배경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배를 곯아 가면서
1년 내내 뼈 빠지게 농사를 짓고도, 동양척식회사에 빼앗기고 지주에 뜯기고 그 알량한 소작마저 떨어
질까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마름에게까지 이런 저런 상납을 하고 나면 소출의 2할도 건지기 어려웠던 삶.
굶다 굶다 지주의 고리대금을 울며 겨자먹기로 빌려 쓰고 나면, 다음 해에는 그 빚을 갚느라 전년보다
더욱 배고픈 악순환. 이것이 바로 당시 조선인의 70~80%나 되던 농민들이 내몰린 궁지였다.
이런 현실에서 부모를 위해 '식구' 하나 줄여 주고픈 마음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났던 소녀들. 그런 소녀들을 인간이라면 어찌 감히 '매춘부'라는 잔인한 모독을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셋째, 교학사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된 논쟁점들 중 하나인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시절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이 있었기에 일제하 자본주의 발전이 있었다'고 기술한 부분을 비판하는 것을 두고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 '성장'의 배경에 어떤 치욕이 있었고, 그 결실이 누구에게 돌아갔으며, '성장'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실과 원인에 대한 고찰은 어디에 있는가?
균형잡힌 시각은 부분적 사실이 아닌 전체 그림을 다각도에서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나무 몇 그루만 내보이면서 숲의 나머지는 무조건 가리려 하는 이들. 숲 전체를 보자는 주장을 단순히
'이념논쟁' 또는 '정치공세'로 치부하는 이들. 민족감정의 차원을 떠나,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인본주의
의 회복을 간절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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