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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 법영/자유게시판

뗏목을 지고 가는 사나이

법왕청 2014. 3. 11. 16:51

                                                뗏목을 지고 가는 사나이 

                                                                                                                                                                                     이원익/불사모 회장

 

 

예수님도 그렇지만 부처님 말씀에는 아주 딱 들어맞는 비유로써 중생을 일깨우심이 많다. 비록 이런 성인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다든가 하찮은 무엇이라도 가르치려면 시시콜콜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시의적절하고 기막힌 비유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 같은 비유라도 엉뚱한 데 갖다 붙이거나 때와 장소, 듣는 이의 수준이 걸맞지 않으면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만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괴로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바다라고 비유하셨고 우리가 인연으로 태어난 이 언덕에서 모든 고통이 사라진 저 언덕에 닿으려면 이 고해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뗏목인데 뗏목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본래 부처님이 말씀하신 뗏목은 이름이 좀 길긴 하지만 '네 가지 거룩한 진리' 호이다. 이 뗏목은 네 개의 큰 통나무로 엮었는데 각각 〈세상은 괴로움>이란 나무, 〈괴로움은 끄달림에서 온다>는 나무, 〈그 끄달림 없앨 수 있다>는 나무, 그리고 〈없애는 방법은 여덟 겹의 바른 길>이라는 나무의 둥치를 잘라 온 것이다.

세월이 좀 흘러 여섯 통나무로 엮은 신형 뗏목도 갯나루에 나타났는데 '여섯 가닥 건너감' 호이다. 이 뗏목의 재료는 각각 〈베풂> 〈지킴> 〈참음> 〈닦음> 〈마음 가라앉힘> 〈슬기>라는 통나무들이다. 네 가닥이든 여섯 가닥이든 아무튼 다루기 쉽고 부리기 쉬워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런 뗏목을 저어 가자면 노도 필요하고 돛이나 삿대, 닻, 밧줄 같은 것도 있으면 좋은데 절이라든가 불경, 불상, 스님, 예불 같은 종교 시설이나 성직자, 문화, 제도 같은 것들이 다 이런 연모들이지만 너무 많으면 뗏목이 가라앉을 것이다. 크게 보면 다른 종교들의 경전이나 시설, 문화나 제도 따위도 그 만든 재료나 모양, 성능과 이름이 달랐지 다 이런 뗏목들이요 부품들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작은 강이든 큰 바다든 일단 건넜다면 거기까지 타고 온 뗏목은 아무리 한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서 애착이 가더라도 버려두고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뗏목을 지고 갈 수야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뗏목을 지고 가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잘 되는 절을, 교회를 꼭 자기가 점찍은 누구에게만 물려주려 하고 그동안 지녔던 무슨 호 함장(그래 봤자 뗏목 젓는 사공인데)이라는 이름을 격상해 계속 지니고 그에 끄달려 더 대접받고 무엇을 챙기려 한다면 그 꼴 아니겠는가.

비단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이런 일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몸담아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일단 이루고 마쳤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거기까지 타고 온 탈것이나 도구는 다 두고 가벼이 떠나야 한다. 그래야 뒷사람들이 쓸 수 있지 않나. 그런데도 구태여 뗏목을 지고 가려는 성직자가 있어 한 번 물어봤더니 도로 건너가서 사람들 더 태워 오려고 그러신단다. 이렇게 깊은 뜻이! 영생토록 거친 바다에서만 사시겠다니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