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여래사 39주년 기념법회 봉행
인연법에 특별한 강조점이 찍힌 부처님 가르침 탓인가. 이달 중순 본보를 통해 차례로 소개된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창건주 설조 큰스님의 종단개혁 투쟁비화(10월 10일자)와 마리나 우리절 주지 운월 스님 스토리(10월 17일자)에 공히 인연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었다.
설조 큰스님은 현재 주석중인 속리산 법주사의 마사토(잔모래)로 덮힌 마당에서 생뚱맞게 자란 버섯이 기이하여 파보니 마사토 아래에 낙엽 썩은 흙이 있더라며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운월 스님은 전자기능공, 산업디자이너, 특전사 장기복무 하사관, 격투기사범, 출가, 동국대진학, 일본유학, 단기체류 위한 미국행, 미국 장기체류와 한의학 공부, 우리절 개원 등 불연속 점의 연속인 것 같은 파란만장 오십여년을 회고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인연이라고 갈무리했다.
한국불교 1600년사 최대의 수난으로 일컬어지는 1980년 10.27법난과 북가주 최대 한인사찰 여래사의 인연은 법난이 아니었던들 여래사가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각별하다. 1970년대 말 조계종 총무원 국장 등을 역임하며 종단개혁의 소장파 리더 중 한명으로 자리잡았던 설조 스님이 법난(당시 정권 입장에서는 불교계 정화) 정보를 미리 듣고 LA에 피신해 있다 구산 대선사의 하명을 받들어 샌프란시스코에 와 한 임대주택에서 여래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10월 27일, 여래사에서는 개원 39주년 기념법회가 봉행됐다. 서울에서는 사흘 앞당겨 총무원장 원행 스님 등 종단의 주요지도자들과 정부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대거 함께한 가운데 법난 39주년 기념법회가 열려 내년 40주년까지 법난 기념관 건립, 법난 문학상 수상자들에 대한 시상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펼쳐졌다. 하지만 법난의 파생품인 여래사 행사는 예년에 비해 단촐하고 조용했다. 근 1년만에 여래사를 찾은 설조 큰스님이 법회를 닷새 앞두고 한국으로 떠났기에 신도들의 아쉬움이 컸다.
신도들의 이런 마음을 헤아려서인지 광전 스님은 법문 첫머리에서 “‘설’자 ‘조’자 큰스님께서 오늘 법회까지 봐주셨으면 좋았을텐데 급한 일이 계셨는지...”라며 “내년에는 40주년이니까 꼭 와주시라 말씀드렸는데 오시겠다고 하셨다”고 신도들과 근 40년 동고동락한 창건주 스님의 부재와 이른 귀국에 대한 아쉬움부터 달랬다.
예년의 설조 큰스님과 달리 광전 스님은 법난이나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조의 법문을 하는 대신 여래사의 오늘이 있기까지 수고한 모든 분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고 주문했다. “우리가 공양할 때 이 음식이 어떻게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모든 은혜를 생각하며 공양게를 하듯이 여래사가 39주년이 되고 또 북가주에서 제일 큰 절이 된 것은 바로 여기 앉아계신 모든 분들, 사정상 못오신 분들, 또 먼저 가신 분들의 원력과 노력이 쌓인 덕분 아니겠습니까.”
스님은 이어 세 종류의 선지식, 카스트제도(신분제도)를 타파한 부처님 가르침 등에 대해 설명한 뒤 여래사의 미래상과 관련해서도 큰 절 짓고 신도 많이 모으는 것과 같은 원대한 발원 같은 것보다는 “(식당에) 음식이 맛있으면 오지 말라 해도 손님들이 많이 오고 음식이 맛없으면 오라 해도 안오듯이 여기 계시는 분들이 한 분 한분 잘 되시면 우리 여래사도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 다짐 겸 당부했다.
앞서 진월 스님은 축사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법공양이 으뜸이라고 강조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자자손손 이어질 수 있는 그런 발원을 하라고 권장했다. 사홍서원과 산회가로 법회를 마무리한 스님과 신도들은 법당에서 생일축하 노래 속에 개원기념 케익 커팅 세리머니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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