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대법회 -현각스님(동국대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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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지혜는 가져서 불편한 것 더 많을 때 부처님 지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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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과 대한불교진흥원이 공동진행하는 신년대법회에서 현각스님
(동국대명예교수)은 <금강경>을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원래 인도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며 원어에서부터 그 뜻을 풀이하는 법문을 했다.
스님의 법문은 지난 1월29일 진흥원 3충대법당에서 진행돼 500여
사부대중이 함께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의 일생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불교계 3대 기관이 공동으로 마련한 신년대법회에 연륜이 가득한
분들이 많이 참석해 경이롭다.
인간만 경이로운 것이 아니고 일체중생이 동참해 보이지 않는 중생까지
두루 동참하는 것이 더 경이롭다.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하루 세 번 반성
하고 내가 읽지 않은 것을 전달하지 않으려 한다. 남에게 관철시키려면 내
생각이 농익어야 하며 잘못되면 업장이 쌓여간다.
모든 공부는 참고서 등에서 낱말의 뜻이 나오나 불교는 낱말의 뜻을
공부하지 않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법수 공부 곧, 낱말공부는 정신세계를 맑게 하고 가슴 응어리를
해소할 기회를 준다. 신나게 공부하자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중국 사람이 번역한 말이다. 인도말로
바지라체디카(Vajracchedika)로, 서역에 금강이란 보배가 있었고
번뇌를 깨뜨릴 수 있는 지혜를 상징하는 말로 담겨졌다.
가장 많이 쓰는 ‘프라지냐(Prajñā)'는 중국어로 의역해 지혜이고,
음역하면 반야이며, 그 말 뜻은 ‘부처님 마음’이다. ‘빠라미르타(Parāmritā)’는 ‘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됐지만 ‘생사번뇌의 이 세상을 떠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이 원뜻이다.
‘청정무구’로 번역된 ‘빠라미(Parāmi)’는 원래 ‘돌아온다’ 영어로
‘to come back' 'return'이다.
외출했을 때 불편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편안하다는 것이 피안의
세계에 돌아간다는 말로 이해된다.
‘수트라(Sūtra)’는 경(經)으로 번역됐지만 ‘생명의 본성에 따라가다’가 원래 뜻이다.
인도어의 ‘수(Su)’는 목숨 ‘수(壽)’이고 ‘뜨라(tra)’는 ‘따라가다’는 말이라서 그렇다.
<금강경> 제1분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은 법회를 하게 된 연유를 동기를 밝힌 것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부처님이 멸도에 즈음 했을 대 아난이 부처님께 ‘
일체 경전은 앞에 어떤 말을 내세워야 합니까?’라고 여쭈었던 것을 부처님이 밝힌
‘여시아문’에서 ‘내 법이 여시(如是)일 뿐만 아니라/
삼세제불의 법도 또한 여시하다는 것을 말한다’는 의미이다.
‘사위국’은 파사익이 지배한 교살라국의 수도로서 ‘사위성’ 옳은 표기이다. ‘
기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에서 ‘기수(祗樹)’는 ‘기원(祗園)’이라고 번역됐으며
파사익왕의 태자이다.
급고독장자는 고독한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이며, 사위성의 장자(長者)인
수달다(須達多)의 이명(異名)이다. 기수급고둑원을 줄여서 ‘기원’이라 하고,
그곳에 세원진 정사를 ‘기원정사’라고 했다. 사위성(Prasenajit)을 말하는
‘쁘라세나(Prasena)’는 마술의 일종이고, ‘파사익’은 ‘마술까지도
이기는(지뜨, jit)’이 합쳐진 것이다.
<금강경> 2분에는 불 여래 세존 등이 나온다. 불(佛)의 원음 ‘부다(Buddha)’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동사 부드(budh)'에서 왔다.
‘세존(世尊)’은 세상에서 존경할 분, 선생님 스승님 이런 말이란 한자어와
달리 원어 ‘바가바트(Bhagavat)’는 ‘생명의 종자를 밭에 뿌리는 분이고 성자’이다.
인도말 ‘바가’는 음부의 뜻이고 자궁을 듯하며 ‘바트’는 밭이고 정원이라
‘생명의 종자’는 곧 진리를 말한다.
‘여래’는 부처님의 10대 명호이면서 ‘따따가타(Tathāgata)’가 원어이며,
따다(Tatha)의 진리란 의미가 주축으로 ‘가다’는 말과 합쳐
‘오고감이 없는 진리-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제6분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은 ‘올바른 믿음을 내는 사람은 드물다’는 의미로,
중심적으로 ‘4상(四相)이 있으면 즉비(則非)보살이다’는 말이 나온다.
원래 보살은 남녀구분이 없다. 4상에서 보살의 정의를 내리면서 ‘4상(相)이
있으면 그 사람은 보살일 수 없다’는 말이다.
4상의 아상(我相)은 원래 ‘아트나(ātna)’ ‘삼지나(samjña)’로서 각각
‘스며들다, 펼치다, 침투하다, 구하다’와 ‘사뭇 알고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인도말로 원래 뜻은 ‘자기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집착심을
사뭇 알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또 4상의 ‘인상(人相)’은 원래 ‘쁘드갈라(Pudgala S.)’로서 ‘Pudgala’는 ‘육신과 정신,
심지어 원소와 업신여기는 감정까지도 사뭇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중생상(衆生相)’은 ‘싸뜨바(Sattva S.)'에서 ’ Sattva‘는 ’자궁(womb)‘이고
요즘의 줄기세포(embryo) 8주’에 연결돼 ‘그것까지도 사뭇 알고 있다’는 말이다.
원래 현장스님이 번역할 때 싸뜨바는 인도유학전인 구역과 유학이후 신역이 달라져,
구역에서 ‘중생’으로 신역에서 ‘유정(有情)’이라 달리 번역됐다.
마지막 ‘수자상(壽者相)’은 ‘생명(jiva)’이 원래 말이다. 이는 ‘수명에
대한 집착심을 사뭇 알고 있다’로 번역돼야 한다.
부처님의 ‘무엇이 없다’는 얘기를 번역한 ‘무아설’을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의 일화에 얽힌 ‘유아무와(有我無蛙) 인생지한(人生之恨)’으로 다시 보자.
신동이며 자칭 백운거사였던 이규보가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 낙방
했다가 23세에 과거에 급제하기 직전의 과거 시험 불신에 대한 일화이다.
고려 명종 임금이 민심을 살피기 위해 평복을 입고 야행을 하다가 해가
저물어 집주인 이규보 주막으로 발길을 돌리려 그 집 대문을 보니 ‘유아무와
인생지한’ 글이 써 있었다. 직역해 보니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스러움이다’는 이 말을 이해 못한 왕은 국밥을 한 그릇 먹고 주모에게
그 대문의 글귀를 물어보았고 결국 이규보가 그 글귀 뜻을 임금에게 설명하게 됐다.
백운거사와 임금의 대화는 임금이 대문 밖 글귀에 대한 질문에 그 내력을
들려주는 것이다. 백운거사는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가 있었고,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 둘이 살면서, 하루는 까마귀가 꾀꾀리에게 내기를
‘3일후에 노래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다만 심판은 두루미가
해야 한다고 제안해 이도 합의했다.
3일 동안 꾀꼬리는 열심히 노래연습을 한 반면 까마귀는 연습하지 않고
큰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에서 개구리를 한 가득 잡아 3일 만에
큰 자루를 뇌물로 주고 심판을 부탁했다.
이렇게 까마귀가 오히려 우승한 내역을 백운거사는 임금에게 얘기했다.
곧 과거 시험 3번이나 낙방하고 있는 그 심경을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이후 임금은 궁궐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하고 이를 문제로 냈고,
이규보는 오체투지해서 절을 하고 답안을 썼다. 세상의 지혜는 가져서
불편한 것이 더 많을 수 있으나 이럴 때 이규보와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이 육신의 현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지혜, 곧 ‘프라지냐’는
금강석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 ‘무상사(無上士)’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무상’은 ‘비교할 수 없는’이 본래 말이고, ‘정등(正等)’은
‘가득차다’는 인도말의 번역이며, <반야심경> <금강경>에서 많이 나오는
이 용어는 ‘비교할 수 없이 가득찬 깨달음’으로 다시 보자. 이제는
내 머리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용어로 다시 봐야 한다.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의 말로, ‘무상사’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봐야 진정한 <금강경>을 볼 수 있다.
청법가에 나오는 ‘감로법을 주소서’란 구절을 들으며 ‘감로수’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감로(amrita)’는 ‘미리타(mrita)’인 ‘죽음’에서
‘아미리타’가 돼 ‘불멸·해탈’이란 말이다. 두 번째의 뜻이 넥타(nectar)란
말로 음료를 의미하게 된다.
‘불이문’이란 용어에서 ‘불이(不二)’는 ‘둘이 아니다’는 말로 이해되지만
사실은 ‘드바야(dvaya)’란 말이 의미하는 ‘가짜’ ‘거짓(falsehood)'가
원 뜻이다. 유마거사의 뷸이법문이란 말은 곧, ’가짜가 아닌 법문-진짜
에센살한 법문-사족이 않 붙은 법문‘이란 의미이다. 거짓이란 ’드바야‘를
떠나 불이문이 성립될 수는 없다.
<금강경>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은 ‘상의 집착을 떠나야
번뇌가 사라진다’는 의미로, ‘진리를 말하는 자’(진어자, 眞語者)
곧 ‘우주의 진실을 말하는 자’와 ‘진실을 마라는 자(實語者)’,
또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如語者)’, ‘실수없이 말하는 자(不誑語者)’, ‘
허위를 말하지 않는 자인 불이어자(不異語者)’ 등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
불이어자’는 진실을 말하고 허위를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상의 집착을
떠나야 번뇌가 사라지고 실상(實相)을 본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좋은 인연으로 같이 자리를 함께해 부처님의 가호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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