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처음이고 나중 된 무엇.
이기희 /윈드화랑 대표ㆍ작가
목마른 사람에겐 물, 배고픈 사람에겐 밥이 최고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겐 술대접이 으뜸이다.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 주면 가뭄에 단비처럼 해갈이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시인이 되겠다며 밥도 술도 직업도
안 되는 문학에 목숨 바치겠다던 청춘 시절! 문학동인회를
결성했지만 문학에 탐구한 시간보단 배고팠던 기억만 생생하다.
나는 술을 전혀 먹지 못한다. 동인들은 모두 술고래. 지지리도
가난해 저녁은 건너뛰고-그래도 술 먹을 돈은 있었던지-안주
없이 낮술부터 밤 늦게까지 강술을 퍼 마셨다. 그 때문였을까?
회장 원도형은 새파란 나이에 간 경화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래도 유일하게 건진 사람은 후배 이창동. 소설가로 데뷔해
감독으로 변신해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명성을 얻으며 활약 중이다.
"무엇을 만드시려 합니까?"소승이 물었다. "여기까지 올라온
손님들이 이 의자에 앉아서 조계산 자락이나 쳐다보고 가라고.
""사람이 없을 때는요.""그 때는 내가 앉지.""스님도 안 계실 때는요."
"이 산중에 떠도는 고독!"
법정 스님의 문답이다.
어느 날 스님은 나무결 다치지 않게 다듬지 않고 참나무로
손수 의자를 만들고 그 의자를 '빠삐용'이라 불렀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허송세월을
보내는데 꿈 속에서 '유죄'를 선고 받는다. 죄목은 '인생을 낭비한 죄'다.
스님은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 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 않는지 생각해보는 거야"라고 했다.
평생 무소유로 살았지만, 스님은 누구에게 쓰임 받는 유익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고 법구경은 가르친다.
욕망의 불길은 쇠를 녹슬게 하듯 모든 아름다움을 앗아 간다.
녹슬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랑도 젊음도 청춘의 빛나던 꿈도
욕망의 바다를 건널 때마다 타협이란 이름으로 녹슬기 시작했다.
그 많고 빛나던 청춘의 다짐과 열정,
세계를 품던 그 찬란한 꿈은 어디로 갔을까? 배고픔과 아픔, 빈곤과
상처, 모진 차별과 가난에도 주눅들지 않던 그 당당했던 청춘의
기상은 어디로 흔적 없이 사라졌을까?
가장 처음 된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 가장 나중에 이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편린으로 힘든 오늘을 견디며
온전한 사랑꽃 피울 수 있는 것처럼.
권력도 명예(?)도 안 되는 칼럼쓰기에 매달려 매주 마감시간 맞추느라
허둥대는 것도 어쩌면 내 처음 된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작업이 아닐런지!
청춘의 못 태운 작은 성냥개비 하나 지금 불씨 지피는 일일 것이다.
가장 처음 된 것은 안 보여도 나중 된 것의 씨앗이 된다.
첫사랑의 짜릿한 키스를 간직한 사람은 언제든지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 꿈을 가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다.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아도 나만의 길을 가는 일이다. 내 길 찾아 꿈을
좇아가는 길은 늘 봄날이다.
법정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펴서 봄이 온다'고 했다.
험난한 세월 견디고 스스로 꽃 피울 줄 아는 사람에게 봄은 꼭 온다.
한오라기 희망의 불씨를 안고 사는 사람에게는 처음과 나중은 같은 말이다.
나의 가장 처음 된 것이 나중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간,
살을 에는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그대에게 바칠 우리 사랑의 처음이자 나중 되는 찬란한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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