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사문 법영/사회일반

애국가, 찬송가로 작사됐었나

법왕청 2014. 2. 7. 09:11

                                          애국가, 찬송가로 작사됐었나 

 

      에모리 대학서 발견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현재와 같은 가사 수록

 

 

애국가가 기독교 찬송가로 작사돼 보급 유통됐을 가능성이 3일 제기됐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대표 혜문 스님)가 최근 에모리 대학을 방문해 윤치호(1865~1945) 애국가 친필본 등 관련 기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행 애국가 전문이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1908)을 발견했다.

이 찬미가는 에모리 대학의 윤치호 관련 스크랩물에 편철되어 있었으며, 융희 2년(1908년) 6월25일 발행된 재판 활자본으로. 발행자는 김상만, 발행소는 광학서포이다. 흰색 표지에 가로 13㎝ 세로 18㎝ 크기이다. 찬미가는 윤치호가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해 1908년 역술해서 펴낸 노래집이다.

15쪽에 실린 애국가는 부제가 ‘애국적 찬송가’(Patriotic Hymn)로 명시된 가운데 노래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부르는 것으로 표기했다. 현행 애국가는 해방 후 안익태(1906~1965)의 곡을 붙인 것이다.

1절의 ‘하나님이 보호하사’(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한 만세’(우리나라 만세), 2절의 ‘바람이슬 불변함은’(바람서리 불변함은), 3절의 ‘구름 없이 높고’(높고 구름 없이), 4절의 ‘님군을 섬기며’(충성을 다하여) 등을 제외하면 후렴구까지 모두 같다.

혜문 스님은 “애국가가 기독교 찬송가로 시작해 기미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의 노래로 승화되는 과정은 작사가 규명에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애국가가 기독교 복음주의와 애국심의 결합으로 탄생된 찬송가의 모습이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안창호(1878~1938)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흥사단 측도 “1907년 안창호가 귀국 후 선천 예배당에서 금식기도 후 찬미가에서 시상을 얻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애국가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작사자 윤치호의 친일 논란과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및 표절설까지 거론된 만큼 “통일 코리아를 염두에 둔 애국가 제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