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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 법영/자유게시판

‘입적’ ‘열반’ ‘원적’ 재가불자에게 쓰면 안 되나

법왕청 2015. 2. 3. 07:26

“올곧게 수행한 사람이라면 원칙적으로 가능”

‘입적’ ‘열반’ ‘원적’ 재가불자에게 쓰면 안 되나

 

 

죽지 않는 생명은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 앞에 놓인 최종적 숙명이자 난제다. 인류는 허다한 철학과 사상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고 값진 죽음을 모색해 왔다. 불교의 수행 역시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고뇌이고 분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부처님은 6년간의 고행과 선정 끝에 마침내 중도(中道)를 깨우쳤다. 중도란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동시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3의 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부처님은 중도를 통찰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실제로 불교는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연기법에 따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의 순리이고 자연의 질서다. 나아가 살아있다면 응당 겪어야할 번민과 시련을 궁극적으로 해소해 준다는 맥락에서,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예컨대 부처님의 죽음을 뜻하는 열반이란 개념에서 불교의 죽음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승보’를 공양하는 교단임을 고려해

대중의 광범위한 합의가 전제돼야”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ana)’의 음차(音差)다. 니르바나의 1차적 의미는 ‘불길이 완전히 꺼져 재만 남은 상태’를 일컫는다. 결국 죽음이란 더 이상 불같이 화를 낼 필요도 없고 세상으로부터 화를 입을 염려도 없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인 것이다.

 

본래 열반은 깨달음으로 이룩한 최고의 경지 혹은 지고의 행복이란 개념이다. 해탈(解脫)과 동의어인 셈이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긍정적 관점과 맞물리면서, 열반은 ‘깨달은 자의 죽음’이란 2차적 의미를 획득하게 됐다.

 

요즘엔 원로 스님들이 돌아갔을 때에도 ‘열반’이란 단어를 왕왕 쓴다. 불교와 종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큰스님에 대한 예우의 표현이다. 알다시피 스님의 죽음은 으레 입적(入寂)이라고 한다.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적멸의 세계로 회귀했다는 뜻으로, 열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다.

 

원적(圓寂)이나 귀적(歸寂)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뜻은 대동소이하다. 특히 덕망이 높은 스님의 입적 기사를 다루게 마련인 불교계 언론에서는 원적이란 낱말을 애용하는 편이다. 부처님의 죽음을 뜻하는 열반은 너무 부담스럽고, 통상적으로 쓰는 입적은 너무 가벼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열반 원적 입적 등 스님의 죽음을 기리는 단어는 많은데, 재가불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단어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는 타계(他界)라는 용어가 그나마 불교적이다. 더구나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세속에서 열심히 정진하는 재가수행자들의 목표는 스님들의 그것과 같고 또한 굳세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형상으로 덤덤히 수용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종국엔 생사의 고통을 넘어서겠다는 것이다. 흔히 재가자가 죽으면 ‘극락왕생하라’고 위로하는데, 어쩌면 이는 그들에 대한 모독이다. 극락이란 천상(天上)도 중생이 윤회한다는 육도(六道) 가운데 하나이며, 필연적으로 말 많고 탈 많은 공간인 탓이다.

 

홍사성 불교신문 논설위원은 “정법에 입각해 투철하게 수행한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을 원적이라고 불러도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다”면서 “다만 승보(僧寶)를 공양하는 조직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대중의 광범위한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관건은 정직하고 올곧게 수행을 했느냐는 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