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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 법영/자유게시판

사과의 계절, 용서의 계절

법왕청 2013. 4. 4. 13:15

사과의 계절, 용서의 계절

                                                                                                               최영권 성프란시스 한인성공회 신부

 

 

몇 해 전의 일이다.

 

평소 가까이 알고 지내는 보림사 주지 경암 스님께서

작품 전시회 관계로 한국에 나가 계시는 동안 내게 전화를 주셨다.

 

예사스러운 전화가 아닌 것을 직감했다.

“스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전화 내용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이번에 한국 방문 중 오래전 알고 지냈던 한 신도가 하루는 찾아와

스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하면 좋겠느냐며 말문을

열었는데 내용인즉 현재 아들이 뉴욕에서 가톨릭 계통의 보딩 스쿨을

다니고 있는데 조울증 증세가 깊어가면서 자주 수업을 빼먹게 되자

학교 측에서 정학처분을 내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학생이 그 해 졸업을 못하면 이곳에서 대학진학은 커녕,

고교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지난 5년의 세월이 허송세월이

되어버리는데 또 나이도 열아홉살이 되어서 한국에 돌아가도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여 아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져 이렇게

스님을 찾아와 하소연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최 신부님, 수고스럽겠지만 이 학생을 위하여 뉴욕을 한번 다녀와 주세요.

가서 교장을 만나 한번 설득해주세요. 불쌍한 중생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스님, 내일 새벽에 당장 떠나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학생의 인생을

위해서 당연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 다녀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튿날 새벽 4시에 뉴욕으로 향했다.

 

교장실을 찾은 나는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김군의 일로 왔노라고

방문의 목적을 설명했다. 교장은 단호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밀린 과제물에 대하여 시간을 연장시켜 주었고 또 치르지

못한 시험들도 치를 수 있도록 특별조치를 취해주었는데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교장을 만나고 있던 그 날은 사순절 기간이었다.

 

 나는 교장에게 이 학생의 부모가 된 심정으로 간청하였다.

 

“교장 선생님,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학생을 불쌍히

보시고 용서를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 학생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학교에서 쫒아내면 앞으로 이 학생의 인생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 인생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용서를 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옆에 동석하여 가만히 듣고 있었던 교감 선생님이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 이 신부님은 자기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학생의

일로 위싱턴에서 이곳까지 운전해 오신 온 분입니다.

 

다시 한번 결정을 고려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경직되어 있던 교장의 얼굴에 온화한 기운이 맴도는

듯하더니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린다.

 

“신부님의 간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조건부로 이 학생에게

졸업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졸업식 날 전까지 밀린 모든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고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 교장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교장과 교감,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도 깊어져 가는 사순절의 어느 날 이 아침에 생긴 일에

대한 잔잔한 감동이 서로 간 교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툭 툭"

김군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난 후 차를 몰아 위싱턴으로 향했다.

 

두달의 시간이 흘렀다. 아름다운 5월의 기운이 온 천하에 두루

편만히 펼쳐진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왔다.

 

“신부님,! 저에요. 저 졸업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잘되었어. 정말 축하해." 통화를 마치고 나니

내 마음은 이미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긴 감사의 한숨이 나온다.

“주님- 감~사합니다---."

 

보림사를 찾은 나는 스님을 모시고 식당으로 가 점심을 들며

아름다운 세상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서로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이야기 하였다.

 

그 이듬해 김군은 다시 내게 전화 한통을 주었다.

“신부님, 저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올해도 사순절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이제 곧 고난주간이 다가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년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사순절이다.

 

그리스도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인류의 죄가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계절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

 

용서함으로 내가 자유하게 되고 상대방도 자유하게 된다.

그러나 용서 이전에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라는 말이

정직한 양심과 인격으로 먼저 전달되어야 한다.

 

사과는 특권이다.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은 자유함을 누리기

위한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사과하는 계절,

 

용서하는 계절. 아- 아름다와라. 사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