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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 법영/국내 불교소식

한국에 부는 티베트 열풍,고려시대 이어 두 번째

법왕청 2014. 1. 7. 20:59

                               자기완성 위주 벗어나 이타적 대승이념 확산될 것

 

한국에 부는 티베트 열풍,고려시대 이어 두 번째
자신 위한 열반 추구보다 타인 구원하는 보살행 특징
한국불교는 자기 성불 강조,대승서 소승으로 돌아간 것,자성과 개혁 계기 삼아야

 

 ▲ 티베트불교는 지구촌을 무대로 도약에 성공했으며 관세음보살의 이상을 사바세계 전체로 펼치고 있다. 사진은 황모파인 겔룩파 종파의 신년법회 ‘묀람’ 광경.


 

근래에 들어서 티베트를 소재로 한 서적, 영화, 음반 같은 문화 인프라가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이루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나라 잃은 망명객 신분인 제14대 달라이라마 텐진가쵸 성하에 대한 존경심도 한 몫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티베트 열풍의 진원지가 바로 티베트불교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티베트불교가 서구에서는 전래 초기의 일부 마니아들의 인식처럼 더 이상 “동양에서 온 신비하고 비의적인 종교”가 아니다. 이미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튼튼한 조직력과 독특한 인프라를 겸비한 나무랄 데 없는 어엿하고 대중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이는 때마침 불기 시작한, 티베트적 콘텐츠의 주도로 이루어진 세기적인 현상들인 ‘힐링’이나 ‘웰빙’ 같은 일종의 바람도 적지 않은 시너지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어찌 보면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닐 수 없지만, 대설산 너머 숨어 있던 종교왕국 ‘티베트’는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대신 티베트불교는 뭇 중생들을 위해 지구촌을 무대로 도약에 성공하여 관세음보살의 이상을 사바세계 전체로 펼칠 준비를 끝낸 것이다.

티베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리에게 가깝고 중요한 문화적·종교적 아이콘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고려시대 원(元)나라의 고려침입 시기에 우리에게 전래된 호풍(胡風) 또는 몽골풍의 실체가 바로 티베트불교였다. 티베트불교의 4대 종파의 하나인 사캬파(薩伽派,Sakya)종파의 중원 입성에 이은 해동으로의 전파는 우리나라 불교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애써 인정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 두 번째로 티베트불교의 회오리바람을 맞고 있다.

이 사캬파 종파의 총본산이 바로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이 신하 18명을 데리고 3년간이나 머물며 수행을 하였다는 그곳으로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도 약 400km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다. 더구나 충선왕의 어머니는 쿠빌라이 칸의 친딸이니 어찌 고려왕실이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겠는가?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원나라를 경유하여 티베트불교가 우리에게 끼친 불교사적 영향이 매우 컸으리라고 여겨진다. 실제로도 현재 우리불교에 혼재되어 있는 티베트불교적인 요소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는 그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일부러 외면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였다.

이제 세계불교사의 흐름은 이미 대·소승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란 분류에 속하는 티베트불교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 그 긴 천여 년의 기다림 끝에, ‘시간의 수레바퀴’ 즉 ‘깔라짜끄라[時輪]’는 마침내 지구촌의 중앙무대로 상륙하였다. 이 사실은 시륜철학의 최초의 완성자인 나로빠가 예언한 대로, 현대의 ‘인드라망(Indra網)’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구촌을 넘어 전 우주를 누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는 고대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티베트불교의 앞날이 탄탄대로만은 아닐 것이다. 제14대 달라이라마 성하의 입적에 따른 후계구도를 말한다. 티베트불교 전체와 같은 비중으로 다가오는 성하가 속한 종파는 과거 오랫동안 법왕을 겸임하던 겔룩파인데, 성하의 입적에 따른 제15대 달라이라마의 옹립문제는 중국당국의 분열획책과 같은 방해공작이나 나아가 카규파의 대표주자인 ‘카르마-카규’ 종파와의 헤게모니 다툼도 예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카르마파는 600년 전에 청나라를 등에 업은 겔룩파에 정권을 빼앗긴 과거를 가지고 있고, 현실적으로도 제17대 카르마파 흑모파(黑帽派) 법주인 외겐틴레 도르제(Ogyen Trinley Dorje)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6살의 나이로 2000년 신년초에 티베트본토의 출푸사원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여 현재 28살의 준수한 청년으로 티베트라는 나라를 지킬 버팀목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그는 ‘리빙 붓다’ 시리즈라는 미디어를 통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티베트불교의 제2인자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필자가 라싸에서 수학하고 있을 당시 출푸사원에서 갓 법주에 자리에 오른 6살짜리의 성하를 알현한 바 있는 인연도 있어서 관심이 깊은 편이다.

그 동안 우리는 티베트불교를 속칭 라마교(Ramanism)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조금은 폄하된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과거의 인식이고 앞으로는 우리 불교계에 불어 닥칠 ‘제2차 티베트불교의 전래’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불교계에 미칠 영향력이 결코 제1차에 비해 적지 않을 것이라 예견되기 때문이다.

티베트가 다시 우리에게 실체를 드러낸 것은 고려시대 이후 천수백여 년 후인 1992년 붉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필자를 포함한 초기 티베트 마니아들이 여행정보 하나 없는 백지상태에서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설역고원을 들락거리면서 티베트에 관련된 다양한 책을 저술한 탓에 이젠 우리의 티베트에 대한 인식도 상당한 수준에 와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또한 한편으로 우리의 현직 승려들 중에도 직접 티베트불교의 수계(受戒)를 받기도 했고 우리나라에도 박물관, 연구소, 전문여행사, 티베트풍의 음식점이 생기는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는 한편 온라인상으로도 티베트전문 카페나 사이트도 생겨서 손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연이은 분신사태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어 티베트의 독립문제와 인권에 목소리를 높이는 마니아들이 꾸준히 증가되는 추세이고 또한 대학에 ‘티베트학’이 본격적으로 개설되는 고무적인 현상도 줄을 잇고 있다.

이렇게 우리 내부적으로 티베트에 관한 관심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과 비례하여 직접 티베트인 혈통의, 티베트 승려에 의해 직접적으로 티베트불교가 전파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그 예가 티베트승려가 주지로 있는, 부산의 티베트사원 광성사와 ‘티벳하우스 코리아’ 같은 곳이 문을 열면서 달라이라마의 생신축하행사인 ‘댄슉’ 같은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다만, 목전에 난제로 남아있는 달라이라마 성하의 방한문제는 앞이 보이질 않고 있어서 불교계에 몸담고 있는, 친 티베트의 마니아들에게 자괴감마저 들게 하고 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대승의 진정한 구경처는 자기 해탈에 있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에 있다. 그러나 큰 수례의 종주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우리 불교계의 현실은 어떤가? 일본 원로학자의 쓴 소리를 곱씹어 볼 일이다.

“티베트불교가 중국·한국·일본의 불교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있다. 동양 3국의 불교가 ‘성불’이라는 말로 자기완성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비하여 티베트불교는 이타행으로 나아갈 뿐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된 이타행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완성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자기완성을 위해서도 이타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어, 마침내 타인을 구원하는 보살행이 아닌 스스로가 구원받는 불교로 변질되어서 대승이 어느 새 소승으로 되돌아가 버린 셈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우리불교의 당면과제가 참다운 대승으로의 회귀임을 이론적으로는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번드레한 이론이 아니라 뼈를 깎는 자성과 동반된 개혁이 뒤따르지 않는 한 한국불교의 앞날은 세계불교사의 흐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족을 하나 달자면, 이제는 티베트불교를 빌미로 하여 돈벌이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몇몇 단체 및 일부 마니아들의 장삿속을 분리하여 행동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